
난민촌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 실험을 시도했다.
그날 밤, 불타는 마을의 한복판에서 울부짖는 소년이 있었다. 그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무너져가는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짙은 연기 사이로 그는 마물에 달려들었다. 서로의 살을 물어뜯고, 뼈를 부수며.
옆에 있던 소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이미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 흐려지는 눈빛. 그녀는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그녀의 피가 뜨거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와 불길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드는 생명. 그리고 그 틈에서 살아남는 자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섭리였다.
" 저 소년은.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강했던 소년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기에, 나는 더 엄격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선별한 마물이 그보다 약했으니까.
나는 바닥에서 반쯤 탄 보석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파란빛이 잔불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앞으로도 살아남겠지. 다음에도 내 실험의 재료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래, 내가 원한 것은 더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가진 나약함을 경멸했다. 그들의 희망, 연대, 동정 따위는 결국 생존을 방해하는 감정일 뿐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도려내고, 오직 강한 자만이 남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이니티움을 찾아갔다.
이니티움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능력을 인정했고, 내가 가진 신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아니, 어쩌면 이용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내 목표는 같았다.
거부하지 않았다. 이니티움이 제공하는 자원과 기술을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내 실험을 계속했다.
나는 이니티움이 공급한 마약을 이용해 또 다른 마을에서 실험을 감행했다.
이 마약은 인간과 마물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그것을 투여받은 자들은 점점 더 이성을 잃고, 본능에 충실해졌다. 이내 그들은 서로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변이했다. 선함을 버리고, 살점을 찢어 삼키며, 점점 더 강한 존재로 거듭났다.
불길이 타오르는 마을 한복판에서, 나는 천천히 걸어 다니며 실험의 결과를 관찰했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집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필사적으로 버티려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뼈를 부수는 소리, 살점이 뜯기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섞여 퍼졌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던 인간들이 이내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 갔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흐느낌. 그리고 부드러운 숨소리.
사건의 중심에 있던 한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여전히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빛났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 시민 ‘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땅을 긁는 날붙이, 축축한 숨결. 불길 속에서도 차갑게 느껴지는 존재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만큼은 살려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리고 서둘러 아이를 밀어냈다.
" 달려. "그 목소리는 공허한 밤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머리가 날아갔다.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몸뚱이는 고개를 숙이듯 앞으로 쓰러졌다. 두개골에서 터져 나온 선홍빛 피가 불길과 어우러져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천천히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고 여린 그림자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아이는 강하다고 봐도 되는 걸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실험용 혈액 샘플이 들어 있었다. 흔들리는 액체를 바라보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적색 지대.
잔해 속에서 적막이 맴돌았다.
금속이 부딪는 둔탁한 소리가 땅에 박힌 강철 장화를 타고 울려 퍼졌다. 두꺼운 금속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마물의 비명이 희미하게 귓가를 맴돌았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오구라 샤온은 단단히 뭉개진 마물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이상했다. 오늘의 전투는 그리 특별 것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기어 나온 마물을 제압했고, 언제나처럼 육중한 철의 팔을 휘둘러 그것들의 목을 부러뜨렸다.
" ...이상해. "강철로 이루어진 손끝이 무겁게 잔해를 헤집었다. 손에 묻은 것은 마물의 검붉은 피.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감촉이 어쩐지 낯설었다.
마물의 사체를 조금 더 헤집자, 부서진 살점 사이로 검은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마물의 일부가 아니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가공된 흔적이 있는, 기묘한 파편이었다.
" ...도시에서 쓰는 금속인가? "마물이 이런 걸 삼킨 걸까? 아니면, 그 안에 있었던 걸까.
그는 한동안 손에 쥔 파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전투 후에 느껴지는 피로함과는 다른, 어딘가 불길한 기분.
" ...! "푸른 빛의 고요한 공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몸을 돌려,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적색 지대를 빠져나갔다.
" 언제까지 그렇게 나약하게 떨고 있을 셈이냐, 아이야. "" 그래, 세상은 자비롭지 않지.
하지만,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강해질 수 있다면… 그런 종족은 차라리 스러지는 편이 나아. "" 허황된 말이다. 너는 아직도 꿈을 꾸는구나.
그런 미련한 희망이야말로, 진화를 멈추게 하는 족쇄다. "피를 흘리지 않는 자는, 결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어.
전쟁터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한낱 유희라도 된다고 믿느냐? "" 하지만... 인간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야. "" 그렇기에 넌 '웨스턴 스퀘어의 유령'이 되었나?
현상금 44위... 그것도 네가 믿는 '이상'을 위한 선택이었나?강해지지 않는 한,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우리 가여운 아이와는 다르게 말이다.내가 원하는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철저히 도려내지는 세계.
아이야. 그것이 현실이란다.코마이가 샤온과 에타를 만나고, 샤온이 그들의 난민촌을 불태운 존재임을 알고, 에타에게서 멀어진 것 얼마 후의 일이다.
도시는 오늘도 살아 있었다.
높은 빌딩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고, 골목마다 켜진 네온사인은 흐릿하게 깜빡였다. 젖은 아스팔트는 차량 불빛을 반사하며 기묘한 색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가 바람에 날렸고, 멀리서 들리는 전차 소음이 이 도시가 아직 잠들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찻집의 문이 열리자 조용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지독한 피비린내를 뒤로하고, 오구라 샤온은 무거운 철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조명이 깔린 실내는 언제나처럼 한적했다.
카운터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타 어니언이 시선을 들었다.
" 어서 오세요. "샤온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았다.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튼튼한 강철 프레임이 추가된 의자였다. 이 찻집에는 몇 개의 이런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고, 그것은 일부러 마련해 둔 것이었다.
" 평소처럼 피곤해 보이시네요. "약간 따갑고, 알싸하며, 한없이 불길한 냄새가 샤온의 긴 머리칼에서 퍼졌다.
그녀는 오래전 기억 속에서 그것을 맡은 적이 있었다.
" ...샤온 씨. 어디서 오셨나요? "샤온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적색 지대. "" 그거 말고요.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샤온은 생각했다.
마물을 상대했을 뿐이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 냄새.
아주 오래전,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품고 있던 하얀 가루.
그것과 같은 냄새가, 샤온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고 있었다.